2021년 12월 18일 토요일 저녁 7시
뮤지컬 <레베카>를 보러 다녀왔다.
내 생에 뮤지컬이라곤 초등학생 땐가 소극장에서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를 본 게 전부였다.
현생에 치여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문화생활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문득 머리를 스친 것이 뮤지컬이었고,
뮤지컬의 뮤 자도 모르는 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유명작들을 찾아 봤고..
<레베카>가 뮤지컬 입문자들도 좋아할만한 작품이라기에 고민없이 예매해버렸다.
<레베카>에 대해 아는 바 라고는 옥주현 나온다!밖에 없었는데 나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옥주현 캐스팅 일자는 모두 매진이었다.
그래서 보게 된 신영숙+박지연+민영기 출연분!
<레베카> 원작 내용도 전혀 모르는 '무'의 상태에서 관람한 뮤지컬이어서 누구보다 신선한 시각에서 후기를 남겨 본다.
(줄거리가 일부 포함되어 있어 스포가 될지도 모름)
1. 작품 내용
사실 작품의 내용이 크게 중요하진 않았던 것 같다.
주인공 '나'의 입장으로 쓰자면 착하고 강직한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을 거치고 성장한 뒤 과거를 그리는 이야기,
댄버스부인 입장에서 쓰자면 '레베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집착과 광기로 변하는 이야기,
막심 입장에서 쓰자면 과거에 얽매여 괴로워하다가 끝까지 괴로워하는 이야기.
원작 소설이 1930년대에 쓰여졌다는데, 옛작품인 만큼 클리셰적인 면들이 있고(어두운 과거를 품고 있는 남주,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이겨내는 여주, 주인공을 괴롭히는 빌런), 예측불허의 흥미진진함같은 걸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음습한 분위기와, 풍문은 무성한데 실체는 아무도 모르는 주인공(레베카), 레베카에 대한 광기의 서사가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점은, 레베카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심지어 옥주현분이 레베카인줄..ㅎㅎ) 정작 본인은 극중 단 1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극중 '레베카'라는 이름은 한 천만번 정도 나오는 것 같다.
극의 모든 서사가 레베카를 중심으로 흘러가는데도 시작부터 레베카는 이미 죽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 노래
작품 내용에 관한 내용은 차치하고, 노래를 빼고 <레베카>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뮤알못 나도 TV에서 몇 번 들어 봤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댄버스부인 테마곡(?) '레베카 ACT2'는 뮤지컬이 끝나고 며칠째 귀에서 떠나지를 않고 있다.
이 강렬한 노래 말고도 작중에 삽입된 모든 노래들이 너무 좋았다. '프롤로그', '행복을 병 속에 담는 법' 등 집에 와서 삽입곡들을 무한반복해서 들었다. 가사 전달력도 좋아서 귀에 쏙쏙 들어왔고, 지금 내 귀에서 무한 반복되는 중.
특히 난 반호퍼부인 테마곡 아메리칸워먼 쏭(제목 모름)이 좀 좋더라..
3. 출연진
출연진들의 연기력이나 가창력을 어찌 평가하랴.
메인캐스팅은 당연히 연기, 노래 모두 완벽했고, 조연 배우분들에게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 성격과 컨셉에 맞는 목소리 톤이나 피지컬 차이가 몰입도를 높였고, 특히 신영숙님의 성량에 압도당했다.
한국인이 외국 작품을(그것도 고딕 풍의) 연기할 때 말투나 분장에서 느껴지는 묘하게 신비한TV서프라이즈 같은 어색함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배우 분들의 연기력이 그 모든 것을 커버했다.
4. 연출
어느 순간 내가 뮤지컬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3D 영화 같은 걸 보고 있나 착각이 들 정도로 일사불란한 연출.
특히 미세스 댄버스와 미세스 드 윈터의 클라이막스 합작쏭에서의 무대연출(이것은 스포하지 않겠다)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뮤지컬 보는구나 싶었다.
5. 관람 에티켓
코로나 확산방지를 위해 뮤지컬 관람시 함성과 환호를 금지하고 있다.
조금 아쉬웠다. 커튼콜 때는 지르고 싶은 함성을 참느라 애먹었다. (방역수칙을 잊은 자들의 외마디 함성만이 조용한 객장을 울릴 뿐이었다..)
대신 박수는 모두가 열심히 쳤는데, 공연 중간 중간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보내는게 뮤지컬의 에티켓인가 보다.
그러나 초심자인 나는 박수 타이밍 잡기가 조금 어려울 때도 있었다. 나는 박수 치고 싶은데 아무도 안 칠 때의 머쓱함.
6. 장비
거의 생애 최초 뮤지컬이었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오페라글라스를 주문해 챙겨갔다.
결론적으로 최고의 소비였다.
나는 1층 뒷편에 앉았고, 영화관을 생각한다면 스위트 좌석 정도 되는 듯 싶었으나.. 좋은 건 가까이서 봐야 더 좋다. 배우들 표정이나 의상, 무대 소품들을 자세히 봐야 재미가 배가되는 듯하다.
총평.
뮤지컬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본 거 또 보는지 알겠다. 다음 번에 이 작품을 또 본다면 지금보다 더 디테일한 부분에서 재미를 발견할 수 있겠지.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다른 작품들도 몇 개 더 봐보고 나서 나중에 재관람해야지.
뮤지컬을 볼 때까지만 해도 이 블로그는 세상에 나올 계획조차 없었기 때문에 찍어 놓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글만 긴 리뷰가 되었지만 뭐라도 문화생활을 즐겼다는 걸 기록하기 위해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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